황랑은 참을 수 없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밖은 으스름 달밤이었다. 황랑은 소리 없이 담을 넘어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오랑캐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무고한 이 집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돼지처럼 살찐 두 시체를 메어다가 거기서 얼마 안되는 연못 속에 던져 버리고 그 길로 산길을 탔다.
끓어 오르던 가슴이 원수의 피를 보자 적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백성이 겪는 수욕과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황랑은 신라 서울을 향하여 동으로 산길을 재촉했다. 평지를 가다가는 필시 어떤 눈꼴 사나운 일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가슴 속에서 펄떡이고 있는 더운 피가 그대로 참고 견딜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산을 타고 가는 것이 오히려 잘 했다 생각되었다.
계룡산 속에서 7년의 수련을 쌓아온 황랑에게는 평지보다 차라리 산길이 더 좋았다. 사특하고 가증스러운 인간들을 떠나서 산의 품, 산의 정기에 안기면, 오직 하늘과 나만이 숨쉴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지고, 그 속에서 황랑은 얼마나 많은 심신의 기쁨을 얻어 왔던 것인가?
사비성을 떠난지 이틀이 되는 날. 산줄기를 타고 오던 황랑은 삼도봉 (三道峰- 충북, 전북, 경북의 도계가 만나는 봉우리)에 이르러 밤을 드샜다.
지새는 새벽,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무렵, 황랑은 자기의 앞길을 위하여 긴 기원을 올렸다. 얼마가 지나서, 볼 위에 흘러내린 눈물을 씻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에는 눈부신 햇살이 산봉우리마다 퍼지고 있었다. 황랑은 아침 공기를 한껏 들여마셨다. 피로가 풀어지고 새 힘이 솟아 났다. 앞으로 3백리, 사흘 후면 서라벌에 닿겠지,
"으아-악"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황랑은 솟아나는 힘을 내뿜었다. 여기서 한 5십리 남짓한 곳에 아버지 황헌장군이 전사한 청풍령이 있었다. 황랑이 삼도봉을 중턱쯤 내려왔을 때였다.
"?"
산 아래 으슥한 곳에서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이 나타났다가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것이었다.
- 구름과 산새만 넘나드는 심산유곡 이런 산중에 사람은 살리 없는데 무엇일까?-
황랑은 무엇에 끌리는 듯 쫓아 내려갔다. 조그만 굴 속인듯 싶었다. 그런데, 분명 그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
- 이런 산 중에 웬 여잘까? -
발자국을 죽이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천지신명 하늘이여, 우리 백제 지키시고, 우리 임금 살피소서...
"?"
황랑은 귀를 의심했다. 기도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백제 스승 도침도사 계룡산 속 계시오니 천지신명 보호하사 길이 살게 하옵시고, 우리 황랑 장부되어 원수갚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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