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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구전사화

용문산 구전사화 3

by 자연사랑1 2017. 11. 30.

청풍령(淸風嶺)이 추풍령(秋風嶺)으로

  
     부하 군졸틀에게 빈틈없는 경계를 명한 장군이긴 하나 무엇인지 모르게 스며드는 불안한 심사에 우수가 짙어져 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며칠을 두고 밤마다 꾸는 그 흉몽은 장군의 마음을 저으기 번거롭게 했다. 

     동이 텄다.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는 장군의 얼굴은 우수가 깃들인 그대로였다.  붉으레한 서광을 등지고 동편 저 멀리 무리져 있는 산붕우리 위에 짙은 요기(妖氣)가 떠 돌고 있었다. 

   ‘흉조로고! 

     장군의 입에서 힘없이 새어나온 말이었다. 

     이틀 후의 일이었다. 낙엽이 뚝뚝 떨어지고 서릿발을 재촉하는 밤이었다. 아직도 여명이 밝아 오려면 몇점이 더 있어야 하는 오경쯤 되었을까? 북진앞 바라지 산등성에서 홀연 횃불이 올랐다. 

     그러자, 때를 같이하여 중진,남진에서도 횃불이 솟았다. 산을 뒤업는 듯한 함성이 밤의 고요를 깨뜨리고 진동했다. 신라군의 야습이었다. 

     야음을 이용하여 공세를 취한 신라군의 습격에 청풍령 진은 바람에 까물거리는 등불처렵 위경에 놓여 졌다.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가운데 다시 한번 양군의 함성이 밤하늘 높이 울렸다. 

     "와······" 

     "와······" 

     항상 낮에만 싸움을 걸어오던 신라가 이번에 야간 기습을 가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였다.  전에도 여러번 이 청풍령 진을 쳐들어 왔었으나 황헌장군의 신묘한 전법과 목숨융 아끼지 않는 백제 군사들의 필사적인 항전에 번번이 실패하고 쫓겨간 쓴 경험이 있었으므로 어둠을 이용하여 백제군의 전투력을 마비케 하고, 이쪽의 군사 할동을 기만시키자는 전술적인 효과를 노린 것으로써 적장 김유신의 지략에서였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대 병력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청풍령 진이 지니고 있는 군사적인 가치란 백제에게나 신라에게나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지난날 신라가 이 청풍령진을 자주 공략했던 것은, 여기만 점령하면 탄현(-지금 대전 동쪽)에서 접전이 없는 한 사비성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쳐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백제로서는 청풍령 진을 잃으면 신라군을 막아낼 더 좋은 지형적 요새를 가지고 있지 않아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칠필 어둔밤,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 비명과 신음, 확확 내뿜는 입김과 입김, 부둥켜 잡고 어울려져 싸우는 힘과 힘의 대결, 아비규환의 처철한 싸움이었다.


온 천지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즐비하게 넘어져 있는 시체가 붉게 물들었다.  백제군은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맹을 날려 분전감투했으나 중과부족이었다.  불꽃이 훨훨 이는 가운데 벅찬 함성이 올랐다.

      "만세--만세-"

신라군은 오랜 숙원을 달성한 것이었다. 개선의 징소리가

      "쾅--쾅--쾅-"

울려 퍼졌다. 싸움은 끝난 것이었다.

      밝아온 새벽 바람에 청풍령 진에는 신라군의 기폭이 세차게 펄럭였다.  피에 젖은 시체들이 널려 있는데 아직도 꺼지지 않은 연기가 파아랗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까-욱"

가까운 곳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먹물처럼 무거운 정적이 흘러갔다.

      이 싸움에서 백제군은 황헌장군을 비롯하여 비겁하게 살아 남은 자 한 사람 없이 다 전사했다.

      산들 바람이 불어와 시체 사이에 낙엽이 굴렀다. 휘영청 맑은 가을밤에 추풍(秋風)에 낙엽지듯 청풍령 진은 무너졌다. 사람들이 <청풍령>을 <추풍령> 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의자왕 14년 늦은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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